연방주의 대 반연방주의 (4) 연방주의자 문헌 개요
04 Feb 20191787~88년 헌법 비준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당시 뉴욕 주의 주지사인 조지 클린턴(미국의 제4대 부통령)은 열렬한 반연방주의자였고, 뉴욕 주의 주의회 의원들과 주법원 판사들도 반연방주의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석했던 다른 2명의 뉴욕 주 대표(존 랜싱과 로버트 예이츠)는 헌법 비준을 반대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뉴욕 주 전체에서 반연방주의 정서가 고조되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해밀턴과 존 제이와 제임스 매디슨이 극복해야 할 도전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반연방주의자의 희망이자 연방주의자의 두려움은 뉴욕 주가 새로운 헌법을 거부하면, 다른 주들도 뒤따를지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새로운 헌법이 완벽한 문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헌법이 주의 권한을 충분히 박탈하지 못했고, 중앙 정부를 충분히 강화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해밀턴은 새로운 헌법이 제2의 조국에 마지막 최고의 희망이라고 믿었습니다. 새로운 헌법이 독립 혁명으로 얻은 자유를 유지하고, 각각의 주가 저마다 주장을 내세우면서 갈등하는 무정부 상태와 내전을 막는 방어벽으로 기능하고, 외국 세력의 침입과 점령과 정복도 방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새로 탄생한 공화국이 파멸의 운명을 피하려면,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은 폐지되어야 하고, 새로운 헌법(Constitution of the Unites States of America)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 혹은 “연방주의자 문헌(Federalist Papers)”에서 제시한 새로운 헌법이 필요한 이유는 크게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각기 주권을 지닌 13개 주의 느슨한 연합은 외국의 공격이나 침입을 적절하게 방어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연합 규약으로 설립된 연합 회의는 각각의 주가 무역과 상업에 관세와 다른 장벽을 부과하는 것을 허락했고, 이로 인해 부분과 전체의 번영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셋째로, 연합 규약은 차이점을 조정하고 심판하거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과세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 없이 13개의 논쟁적이고 다투기 좋아하는 주들에게 다수의 주권을 허용했습니다.
반연방주의자 역시 연합 규약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개정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반연방주의자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면 미국이라는 정치적 통일체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13개 주의 주요한 권한을 박탈하여 연방 정부(중앙 정부)에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연방주의자는 이러한 변화가 연방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했지만, 반연방주의자는 13개 주의 정당한 권한을 빼앗고 연방 정부가 지나치게 강력해질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새로운 헌법은 주권을 지닌 주들을 전능하고 통합된 중앙 정부에 복종하는 노리개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반연방주의자는 새로운 헌법으로 설립될 중앙 정부가 미국인의 권리와 자유를 유린할 것이고, 연방 하원은 충분하게 대표되지 않은 채로 과세 권한을 행사할 것이고, 시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하원과 무관심하고 귀족적인 상원과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대리 국왕이 지배할 것이고, 선출되지 않은 연방 사법부의 폭정이 펼쳐질 것이고, 전문적인 군인으로 구성된 “상비군”이 시민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주에서처럼 뉴욕 주에서도 반연방주의 정서가 널리 퍼진 상태였기 때문에 푸블리우스는 힘겨운 투쟁에 직면했습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연방주의자든 반연방주의자든 “민주주의(democracy)”를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모두에게 “데모크라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정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정은 어리석은 다수가 지배하는 중우정의 냄새를 짙게 풍겼고, 특히 하층 노동 계급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에 봉사하는 정치 체제로 간주되었습니다.
서구의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위대한 정치 철학 저서인 플라톤의 “정체(Politeia)”는 부분적으로 중우 정치의 해악에 대한 숙고였습니다. 플라톤은 민주정이 중우정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했습니다. 왕정이나 귀족정은 한 사람이나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때문에 폭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민주정은 다수가 지배하기 때문에 적어도 처음에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지만, 충동의 억제도 결여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민주정의 시민을 시장에서 “여러 색깔의 천으로 만든 외투”를 보고 구입한 쇼핑객에 비유합니다. 여러 색깔의 천으로 만든 외투는 보기는 좋아도 두어 번 입으면 닳아서 결딴이 납니다. 플라톤은 민주정이 사회의 한계를 시험하는 안 좋은 경향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플라톤은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을 약탈하고, 낭비가 파산을 낳기 때문에, 민주정은 불가피하게 무정부 상태로 타락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정부 상태는 참주(tyrant)의 통치로 이어집니다. 참주는 자기 자신의 가장 나쁜 본능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군중의 가장 나쁜 본능에 호소하는 악당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대표적인 현대적 참주는 도날드 트럼프 전직 미국 대통령이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직 브라질 대통령 같은 대중 영합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주는 한 사람으로 구현된 군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중우정에 맞서는 유일한 실행 가능한 대안이 수호자 계급의 통치라고 주장했습니다. 유아기부터 감정을 통제하고 본능보다 지혜를 우선시하도록 훈련 받은 철학자 왕이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적인 대안입니다.
고대 희랍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플라톤의 위대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합법적인 정치 체제를 왕정(monarchy, 지배자가 한 명인 정체)과 귀족정(aristocracy,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체)과 혼합정(politeia,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의 요소가 섞인 정체)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왕정이 왜곡되면 참주정(tyranny)이 되고, 귀족정이 왜곡되면 과두정(oligarchy)이 되고, 혼합정이 왜곡되면 민주정(democracy, 민중이 지배하는 정체)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적인 정치 체제인 왕정이 왜곡된 참주정이 가장 나쁜 정치 체제이고, 그 다음으로 과두정이 나쁘고, 민주정이 가장 견딜만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부유한 소수가 사회의 부를 독차지하면 민주정은 곧바로 중우정으로 변합니다. 플라톤보다 좀 더 실제적인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민중의 의지를 제한하기 위해 왕정의 요소와 귀족정의 요소를 혼합하고, 둘째로 사회의 안정에 이해관계가 있는 광범위한 중간 계급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근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1787년 미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대통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왕정의 요소를 반영하고, 연방 상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귀족정의 요소를 반영하고, 연방 하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민주정의 요소를 반영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변덕에 휘말리지 않도록 선거가 아닌 대통령이 연방 상원의 동의를 받아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권력자나 권력 집단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대법관에게 종신 재직권(tenure)을 보장했습니다. 미국의 정치 제도 중에서 대중과 가장 가까운 기관은 2년 임기의 연방 하원이고, 4년 임기의 대통령은 일종의 인기 투표로 선출되기 때문에 대중의 여론에 민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6년 임기의 연방 상원은 당장의 여론보다는 긴 안목을 가지고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기에 적합한 기관입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인 혼합정(politeia, polity)을 공화정(res publica, republic)이라고 불렀습니다. 르네상스 기간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인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 정치 사상을 부활시켰고, 17세기 중반 영국 혁명을 주도한 청교도 세력은 국왕인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국(Commonwealth and Free state)을 수립하면서 공화국(commonwealth, republic) 이론을 확립했습니다.
연방주의자와 반영반주의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18세기 초반 공화국 이론은 (1) 시민에 의한 (혹은 시민을 위한) 지배와 (2)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통치자나 시민 대표의 권한은 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화정이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시민과 통치자나 시민 대표가 덕목 –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애국심과 자기 희생과 공익에 대한 헌신 – 을 갖추어야 합니다. 공화국의 시민이 이러한 덕목을 결여하거나 상실하면, 곧바로 부패하고 시민의 자유(시민이 시민을 스스로 통치하는 자유)를 군주나 독재자에게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시민의 자유를 유지하는 수단 중의 하나는 급료를 지급받는 직업 군인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금지하고, 그 대안으로 무장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민병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고대 아테네와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던 민회(ekklesia, comitia)에서 투표권을 갖는 시민은 모두 자기 돈을 무장하고 공동체를 위한 전쟁에 참여하여 혈세를 치른 중무장 보병이었습니다. 아테네가 주도한 희랍의 도시 국가 연합이 대제국인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던 이유도 모두 시민병을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고용한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전쟁에 동원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제국은 아테네와 로마 시민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시민병이 공화정의 토대라는 전통은 신생 공화국인 미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 많은 총기 사고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2조가 폐지되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2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규율이 잘 잡힌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하는 시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많은 미국인들이 민병대가 고대 아테네와 로마의 시민병 전통을 계승하고,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와 로마의 시민병이 자기 돈으로 갑옷과 무기를 구입하여 전쟁에 참여했듯이 민병대도 자기 돈으로 총기를 구입하여 시민의 자유를 지킵니다.
미국 독립 혁명(American Revolution, 1776~83) 기간 “공화국”은 모든 독립파 애국지사의 표어였습니다. 패트릭 헨리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고 절규했을 때의 자유는 공화국의 자유(사적 자유가 아닌 공적 자유)를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보면, 1787년 9월 17일 새로운 헌법 초안이 공개되었을 때, 새로운 헌법에 따라 창출된 정치 체제가 진정한 공화국인지가 첫 번째로 제기된 질문이었다는 점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연방주의자는 새로운 헌법이 만들 정치 체제가 공화국이라고 주장했지만, 반연방주의자는 부인했습니다.
“연방의 농부(Federal Farmer)”라는 필명을 사용한 반연방주의자는 헌법 비준 논쟁이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자신 같은 “진정한 공화주의자(true republican)”와 푸블리우스 같은 “공화주의자인척 하는 반공화주의자(pretended anti-republican)” 사이의 논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헌법 비준 논쟁 당시의 지적 정서에 비추어 보면, 연방의 농부는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고 정확한 문제 제기를 한 것입니다. 푸블리우스는 새로운 헌법이 공화정의 진정한 원칙에 완전히 일치한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푸블리우스와 동료 연방주의자는 이전에 없었던 13개의 주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공화국, 다시 말해서 엄청나게 확장된 공화국을 옹호해야 했습니다.
연방주의자 문헌 85편은 각각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 연방주의자 문헌의 개요를 제시합니다. (해밀턴)
2. 필라델피아 회의가 소집된 이유와 새로운 헌법의 초안이 마련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제이)
3~8. 연합 규약에는 국방 규약이 없기 때문에 외국의 침공에 적절하게 대비하지 못하고, 국내적으로 반란과 내전에 대비한 적절한 방책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제이 [3~5], 해밀턴 [6~8])
9. 대규모 연합이나 새로운 헌법이 창출하는 복합 공화국에는 없는 소규모 공화국의 결점을 제시합니다. (해밀턴)
10. 거대하고 확장된 공화국을 추가적으로 옹호합니다. (매디슨)
11~13. 연합 규약은 무역과 상업에 적대적입니다. (해밀턴)
14. 확장된 공화국을 추가적으로 옹호합니다. (매디슨)
15~17. 연합 규약은 각각의 주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중앙 정부에게는 충분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헌법은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춥니다. (해밀턴)
18~20. 과거의 실패한 연맹과 비교하여 대규모 연합의 장점을 설명합니다. (매디슨)
21~36. 연합 규약은 적절한 과세 권한과 육군과 해군을 지원할 적절한 권한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해밀턴)
37~40. 새로운 헌법의 초안은 타협의 정신으로 형성되었고, 존경 받는 시민 집단이 공화정의 원칙에 따라 작성했습니다. (매디슨)
41~46. 새로운 헌법이 부여한 군사적, 외교적, 주와 주 사이에 관한 권한은 각각의 주가 보유한 권한을 보완하고 보충합니다. (매디슨)
47~51. 새로운 헌법이 제시한 권력 분립을 소개합니다. (매디슨)
52~61. 연방 하원을 설명하고 옹호합니다. (매디슨 [52~58], 해밀턴 [59~61])
62~66. 연방 상원의 구성과 선거 방식, 연방 상원이 보유한 조약에 관한 권한, 연방 상원이 보유한 탄핵에 관한 권한을 설명합니다. (매디슨 [62~63], 제이[64], 해밀턴[65~66])
67~77. 행정부를 설명합니다. 대통령의 사면권과 조약 체결권과 임명권은 헌법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공화정의 원칙과 일치합니다. (해밀턴)
78~83. 사법부를 설명합니다. 사법부의 권한은 적법 행위에 대한 요구와 탄핵의 위협과 다른 한계로 제한됩니다. (해밀턴)
84~85. 다양한 반대에 대답합니다. 권리 장전이 불필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해밀턴)
참고로 이 시기의 간략한 연대표를 소개합니다.
1781년 3월 1일 –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1783년 9월 3일 –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이 체결되었고, 공식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for Independence) 혹은 미국 독립 혁명(American Revolution)이 종결되었습니다.
1786년 9월 14일 – 애너폴리스 회의(Annapolis Convention)가 연합 규약을 개정하기 위한 전국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사추세츠 주 서부에서 발생한 셰이즈의 반란(Shays’s Rebellion)을 다가올 무정부 상태의 조짐으로 간주했고, 결과적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1787년 2월 21일 – 연합 회의(Congress of the Confederation)가 연합 규약을 개정하기 위한 전국 회의를 필라델피아 시에서 개최했습니다. 로드아일랜드 주를 제외한 12개의 주가 대표단을 파견했습니다.
1787년 5월 25일 – 필라델피아 시에서 제헌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가 열렸고, 연합 규약이 폐기되고 새로운 헌법의 초안이 마련되었습니다. 뉴욕 주의 로버트 예이츠를 포함한 몇몇 대표들은 분노하면서 필라델피아 시를 떠났습니다. 로버트 예이츠는 대표적인 반연방주의자인 “브루투스”로 활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787년 9월 17일 – 제헌 회의는 새로운 헌법을 승인하고 휴회했습니다. 제헌 회의는 새로운 헌법을 인쇄하여 13개 주 전체에 유포했고, 로드아일랜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게 새로운 헌법을 비준하거나 거부하는 회의를 개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헌법 비준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787년 10월 5일 – “보초병(Centinel)”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반연방주의자가 새로운 헌법을 공격했습니다.
1787년 10월 6일 – 필라델피아 시에서 행해진 제임슨 윌슨의 연설은 새로운 헌법에 찬성하면서 반연방주의자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고, 재인쇄되었습니다.
1787년 10월 8일 – “연방의 농부(Federal Farmer)”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반연방주의자(아마도 뉴욕 주의 멀랜튼 스미스)가 연방주의자에 대한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1787년 10월 18일 – 뉴욕 주의 반연방주의자인 “브루투스(Brutus)”가 새로운 헌법을 비판하기 위해 16편의 편지 중에서 첫 번째 편지를 출판했습니다.
1787년 10월 27일 – “푸블리우스(Publius)”가 첫 번째 연방주의자 문헌을 발표하면서 뉴욕 주의 헌법 비준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1787년 12월 7일 – 델라웨어 주가 첫 번째로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7년 12월 12일 – 펜실베이니아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7년 12월 18일 – 뉴저지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1월 2일 – 조지아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1월 9일 – 코네티컷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2월 6일 – 매사추세츠 주가 연방 정부의 권한을 추가적으로 제한하기 위해 수정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3월 22일 – 연방주의자 문헌 제1권(1~36)이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1788년 4월 10일 – 브루투스가 새로운 헌법에 반대하는 열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를 출판했습니다.
1788년 4월 28일 – 메릴랜드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5월 23일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5월 28일 – 연방주의자 문헌 제2권(37~85)이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1788년 6월 21일 – 뉴햄프셔 주가 아홉 번째로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6월 25일 – 버지니아 주가 아슬아슬하게 89표 대 79표로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고, 수정 조항을 제시했습니다.
1788년 6월 26일 – 뉴욕 주가 아슬아슬하게 30표 대 27표로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88년 8월 4일 – 노스캐롤라이나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789년 3월 4일 – 새로운 헌법이 미국의 법이 되었습니다.
1789년 4월 30일 – 조지 워싱턴이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1789년 6월 8일 – 연방 하원 의원인 제임스 매디슨이 권리 장전(Bill of Rights,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제10조)을 제출했습니다.
1789년 9월 25일 – 연방 의회가 비준을 위해 권리 장전을 각각의 주로 보냈습니다.
1789년 11월 21일 – 노스캐롤라이나 주가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90년 5월 29일 – 로드아일랜드 주가 마지막으로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1791년 12월 15일 – 권리 장전이 비준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멋진 드라마 중 한편을 감상한 기분이 어떤가요? 미국은 독립과 건국 과정부터 지금까지 인류에게 항상 이상과 새로운 발상을 제공한 나라입니다. 중국과의 경쟁이 본격화된 21세기에도 미국은 여전히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국을 이해하고, 나아가 미국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사이의 논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사이의 쟁점을 하나씩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방주의자 문헌”과 “브루투스의 편지”에 관한 내용은 “The Federalist with Letters of “Brutus”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edited by Terence Bal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와 “The Federalist Papers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edited by Lawrence Goldm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