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주의 대 반연방주의 (1) 미국 독립 혁명과 헌법 비준 논쟁
01 Feb 2019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부터 시작하여 1732년 조지아 식민지까지 13개의 식민지를 북아메리카 대륙에 건설했습니다.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달리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가족 단위의 자영농 정착민이 다수를 이루었기 때문에, 식민지 거주 인구도 많았고, 방대한 농지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 주민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과는 반대로 영국의 식민지 주민은 처음부터 아메리카 원주민과 충돌이 잦았던 이유도 땅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게 자체적으로 무장할 수 있는 권리와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식민지는 영국의 특별 대우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세력 균형이 완전히 뒤바뀐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으로 인해 영국과 13개 식민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7년 전쟁의 결과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패권을 장악했지만, 전비 부담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습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설탕세(1764)와 인지세(1765)를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보충하려 했지만, 대규모 폭력 시위에 직면했습니다. 1767년 영국은 일련의 타운젠드 법률(Townshend Acts)을 제정하였고,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납, 종이, 페인트, 유리, 홍차 같은 일상 용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고대 아테네에는 시민이 시민권을 유지한 상태로 식민지에 건너가 토지를 불하받고 정착하는 클레루키아(klerouchia) 제도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에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아테네 시민을 클레루코스(klerouchos)라고 불렀고, 클레루코스 자신과 후손은 언제든지 아테네로 돌아와 아테네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아테네의 다른 일반적인 식민지 주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클레루키아는 다른 일반적인 식민지처럼 자치권을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로마가 건설한 식민지는 대체로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영국인을 포함한 모든 유럽인에게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논쟁의 근거는 항상 고대 희랍과 로마의 전통입니다. 이 점은 미국인도 마찬가지이고,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가 거론하는 사례 역시 대부분이 고대 희랍과 로마의 역사입니다. 연방주의자를 상징하는 푸블리우스와 반연방주의자를 상징하는 브루투스 역시 고대 로마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13개 식민지 주민은 스스로를 영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식민지 주민을 대표하는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와 모든 문제를 협의해야 하고, 프랑스와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에 대항하여 싸운 7년 전쟁의 비용은 식민지 주민을 포함한 영국인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해야 하고,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지역을 개척하는 것은 영국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기 때문에 영국 군대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식민지 주민을 영국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770년 3월 5일 영국 군인이 5명의 식민지 주민에게 총을 쏜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 이후 타운젠드 법률에 의한 관세는 대부분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1773년 5월 10일 제정된 홍차 조례(Tea Act)를 둘러싼 영국과 식민지의 갈등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으로 비화되면서 영국과 13개 식민지는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홍차 수입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고, 영국은 홍차 수입에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관세가 부과되지 않은 네덜란드의 홍차를 밀수해서 파는 쪽이 이익이 컸기 때문에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홍차 시장은 밀수업자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의 누적된 적자를 해소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동인도회사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홍차 공급을 독점하도록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3개 식민지 주민은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홍차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정책이었지만, 홍차 밀수업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의회가 독단적으로 직접세를 부과하는 것은 식민지의 자치권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한 사람들 역시 분노했습니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을 입고 도끼로 무장한 100여명의 식민지 주민들은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에 실려 있던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1774년 영국은 보스턴 항을 폐쇄했고, 매사추세츠 식민지 자치 정부를 해산하려고 했습니다.
영국이 식민지에 대한 직접 통치로 정책을 전환하자, 그 전까지는 연결점이 거의 없었던 12개 식민지는 1774년 9월 5일부터 10월 26일까지 펜실베이니아 주의 필라델피아 시에서 제1차 대륙 회의(First Continental Congress)를 개최했습니다. 조지아 식민지는 가장 늦게 설립되었고, 규모도 가장 작았고,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투 때문에 영국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1775년 5월 10일부터 1781년 3월 1일까지 13개 식민지는 필라델피아 시에서 제2차 대륙 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를 열었습니다.
제2차 대륙 회의를 통해 13개의 식민지는 단결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연합 규약(연합과 영속적인 연방에 관한 규약, 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이라는 헌법을 제정하여 느슨한 연대를 맺었습니다. 1779년 초안이 작성되고, 1781년 비준된 연합 규약은 당시에 널리 퍼진 인식에 따라 집중된 권력과 중앙집권화된 정부를 불신했습니다. 1781년 3월 1일부터 1789년 3월 4일까지 미국의 중앙 정부 역할을 한 연합 회의(Congress of the Confederation)가 외교와 군사에 관련된 권한을 보유하는 것은 인정했지만, 13개의 주가 독립적인 주권을 누렸습니다.
연합 규약은 미국 독립 혁명(American Revolution, 1776~83) 기간과 영국을 패배시킨 뒤의 의기양양한 시절에는 제 기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17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정치적 분위기는 확연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786~87년 매사추세츠 주 서부에서 대니얼 셰이즈가 주도한 무장 봉기(셰이즈의 반란, Shays’s Rebellion)가 발생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 운동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의 지배 계급과 채권자는 부채 경감과 세금 감면을 요구한 가난한 농민의 시위와 반란을 채무자와 민주주의자의 음모로 간주했습니다.
1786년 뉴저지 주와 뉴욕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와 델러웨어 주와 버지니아 주에서 온 12명의 대표들이 매릴랜드 주의 애너폴리스 시에 모여서 연합 규약을 개정할 것을 요구한 것도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흔히 애너폴리스 회의(Annapolis Convention)라고 불리지만, 이 회의의 정식 명칭은 연방 정부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대표 모임(Meeting of Commissioners to Remedy Defects of the Federal Government)이었습니다. 애너폴리스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더욱 강력한 연방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뉴욕 주의 대표 알렉산더 해밀턴이었습니다.
연합 회의는 연합 규약을 개정하는 것을 망설였고, 1787년 5월 25일 12개의 주에서 온 대표들이 또 다시 필라델피아 시에 모였습니다. (급진적이고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로드아일랜드 주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뉴욕 주 대표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버지니아 주 대표인 제임스 매디슨은 연합 규약 대신 완전히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쪽으로 합의를 이끌었고, 필라델피아 회의(Philadelphia Convention)는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제헌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버지니아 주의 대표인 패트릭 헨리는 군주제의 악취가 난다면서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참석한 다른 2명의 뉴욕 주 대표인 존 랜싱과 로버트 예이츠는 새로 제정된 헌법에 반대하겠다고 맹세하면서 분노에 차서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브루투스” 라는 필명으로 가장 열정적이고 논리 정연한 반연방주의 문헌을 발표한 사람이 로버트 예이츠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브루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하여 로마 공화국을 구하려고 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따른 필명이라고 추정됩니다.
필라델피아 회의에 모인 55명의 대표들은 연합 규약 개정이라는 원래의 목적과는 반대로 연합 규약을 폐지하고, 1787년 여름 연방주의(federalism)에 기초하여 완전히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1787년 9월 17일 새로운 헌법 초안이 완성되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모든 주에게 헌법 비준을 호소했습니다.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가 새로 제안된 헌법을 비준하거나 거부하는 회의를 개최하는데 동의했습니다. 새로운 헌법이 발표되기 위해서는 최소 9곳의 주(13곳의 주 중에서 2/3 이상)가 헌법을 비준해야 했습니다.
1787~88년 헌법 비준을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었고, 헌법 비준 논쟁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비폭력적인 논전이었습니다. (노예 제도와 연방 탈퇴를 둘러싼 두 번째 논쟁은 내전이라는 폭력으로 끝났습니다.) 연방주의자(Federalist)에게는 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적과의 싸움이었고, 반연방주의자(Antifederalist)에게는 헌법 비준에 찬성하는 변절자와의 싸움이었습니다. 1786년 미국의 사전 편찬자인 노아 웹스터는 연방주의(federal)와 반연방주의(anti-federal) 사이의 차이점을 더욱 거대한 중앙집권화된 연방 정부의 권력을 선호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의했습니다.
헌법 비준 논쟁은 자유, 독재, 덕목, 부패, 대의제 같은 공화국 담론의 필수적인 개념의 의미를 둘러싸고 전개되었고, 많은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공화국이란 무엇일까요? 공화국의 최적 규모와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공화국의 자유가 가장 잘 유지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이고, 사라질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어떤 대의제가 공화국에 가장 적합할까요? 정부와 시민의 부패를 늦추거나 완전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공화국이 오래 세월 유지되려면 어떤 헌법적 수단과 기구가 필요할까요? 공화국을 가장 잘 수호하는 것은 전문적인 상비군일까요, 지원병으로 구성된 시민 민병대일까요?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부도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이 필요할까요?
헌법 비준 논쟁이 흥미롭고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라는 최초의 근대적인 공화국이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공동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아테네의 솔론처럼 한 사람의 입법자의 명령으로 개혁적인 법률을 도입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한 역사적 사례는 가끔씩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과 이론적 관점을 지닌 당파 사이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새로운 정치 체제가 집단적으로 구성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새로운 헌법에 대한 반연방주의자의 비판은 새로운 헌법에 대한 연방주의자의 옹호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헌법의 의미가 명확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 정당화도 확립되었습니다.
헌법 비준 논쟁은 신문 기사와 소문헌과 소책자와 설교의 형태로 엄청나게 많은 문헌을 산출했습니다. 이러한 문헌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읽히는 문헌은 “푸블리우스”라는 필명으로 작성된 “연방주의자 문헌(The Federalist Papers)” 85편입니다. 푸블리우스는 로마의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하고 로마 공화정을 설립하는데 일조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를 따른 필명입니다. 85편의 연방주의자 문헌은 뉴욕 주 출신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고안하고 계획했지만, 뉴욕 주 출신인 존 제이와 버지니아 주 출신인 제임스 매디슨이 참여하여 완성되었습니다. 반면에 그 동안 단순한 반대자나 “믿음 없는 사람들”로 무시되었던 반연방주의자의 문헌은 “브루투스의 편지(Letters of Brutus)” 16편 정도가 지금까지 읽히는 편입니다. 하지만, 반연방주의자 역시 미국의 설립자(founders)였습니다.
헌법에 반대하는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주장이 없었다면, 연방주의자 문헌이 나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방주의자 문헌이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 헌법에 대한 이해 역시 엄청나게 부실해졌을 것입니다. 미국 헌법은 주장이나 설명이 없는 간략한 문서입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은 미국 헌법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합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은 연합 규약이 왜 불만족스럽고, 왜 삼권분립이 필요하고, 왜 양원제 의회가 필요하고, 왜 최종 항소 기관으로 연방 대법원이 바람직하고 필요하고, 왜 귀족 작위를 불법화하고, 왜 권리 장전이 불필요한 추가이고, 왜 다른 많은 규정과 금지가 헌법에 쓰여있거나 완전히 생략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은 해설과 설명과 설득을 확대하여 헌법 비준 논쟁에 기여한 문헌입니다. 하지만, 철학적 추상화를 배제한 철저하게 현실적인 정치 이론 문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연방주의자 문헌과 반연방주의자 문헌이 미국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과 정치 이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저 높이 있는 하늘 위의 구름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대답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 자체입니다. 연방주의자와 반영반주의자는 200년 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을 제공했지만,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까지 제공한 것을 아닙니다. 지금의 문제는 지금의 대답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공화국과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다하려면 어떤 정치 체제와 정치 이론과 정치 철학이 필요할까요? 연방주의자 문헌과 반연방주의자 문헌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입니다.
“연방주의자 문헌”과 “브루투스의 편지”에 관한 내용은 “The Federalist with Letters of “Brutus”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edited by Terence Bal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와 “The Federalist Papers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edited by Lawrence Goldm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을 참조했습니다. 미국 독립 혁명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The Glorious Cause: The American Revolution, 1763~1789 (Robert Middlekauff; Oxford University Press, 2005)”를 참조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