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주의 대 반연방주의 (3) 푸블리우스와 미국 초기 역사
03 Feb 2019연방주의자 문헌은 오랫동안 심오하고 실제적인 정치 이론 작품이자 미국의 고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1788년 11월 18일 제임스 매디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연방주의자 문헌을 “통치 원리에 관해 지금까지 쓰여진 최고의 해설서”라고 격찬했습니다. 그리고 1790년 3월 30일 어린 시절 함께 자랐고, 버지니아 주 주지사를 역임한 토머스 만 랜돌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연방주의자 문헌을 존 로크의 “통치에 관한 두 편의 논문(Two Treatises of Government)”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통치에 관한 존 로크의 소책자는 어느 정도까지는 완벽하지만, 이론에서 실천으로 들어가면 연방주의자 문헌보다 더 나은 책은 없습니다.”
반세기 뒤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에서 50편의 연방주의자 문헌을 상세히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이 책에서 연방주의자 문헌을 언급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미국 헌법이 되는 법안의 초안이 공개되고 비준을 위해 각 주에 제출되었을 때, 당시에 이미 유명했지만 나중에 더욱 유명해질 세 명 – 존 제이, 해밀턴, 매디슨 – 은 제안된 헌법의 장점을 알려주기 위해 의기투합했습니다. 이들은 언론에 일련의 기사를 게재했고, 기사들이 모여 완성된 논문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은 훌륭한 책이고, 특히 미국에 관련된 문헌이지만 모든 나라의 정치인이 알아야 합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은 20세기 내내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에게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진보적인 역사학자인 찰스 비어드는 미국 헌법을 엘리트주의적인 반민주적인 문서로 간주했지만, 연방주의자 문헌은 칭찬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20세기 후반 보수적인 정치학자인 클린턴 로시터 역시 연방주의자 문헌을 미국이 산출한 정치 이론의 고전이라고 높게 평가했습니다.미국의 초대 부통령이자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말처럼 연방주의자 문헌은 “고대의 위대한 입법자들이 살고 싶어했을” 역경과 흥분으로 가득 찬 시기에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연방주의자 문헌은 체계적인 정치 이론이 아니라 1787년 10월부터 1788년 5월까지 불과 7개월 만에 엄청난 속도로 쓴 85편의 신문 사설의 모음입니다. 세 명의 저자는 확연히 다른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지만, 푸블리우스라는 필명 아래 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푸블리우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새로운 헌법을 비준하도록 뉴욕 주의 시민을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의 원래 목표는 이미 달성되었지만, 연방주의자 문헌은 원래 목표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방주의자 문헌을 고안하고 계획한 사람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지만, 곧바로 존 제이와 제임스 매디슨도 참여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조합은 엄청난 동반 상승 효과를 냈지만, 불가능한 조합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미국의 건국 과정이고, 연방주의자들 내에서 발생한 두 개의 파벌 – 급진주의적인 연방주의와 공화주의적인 반연방주의 – 이 형성되고 대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파벌은 지금도 미국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독학으로 공부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습니다. 해밀턴은 1755년 서인도 제도에서 결혼하지 않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해밀턴을 버렸고, 어머니는 일찍 죽었습니다. 존 애덤스는 해밀턴을 “스코틀랜드 출신 행상인의 사생아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순전히 의지와 지성의 힘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해밀턴은 잠시 뉴저지 대학(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에 다녔고, 1773년부터 뉴욕 시의 킹스 칼리지(지금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해밀턴은 킹스 칼리지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애국자 결사에 참여했고, 독립 전쟁이 벌어지자 정치 팸플릿을 작성하면서 군사 작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냈습니다. 1777년 대륙군(Continental Army)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해밀턴을 부관 겸 비서로 발탁했고, 중령으로 승진시켰습니다. 독립 전쟁 승리 이후 해밀턴은 뉴욕 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해밀턴은 1786년 애너폴리스 회의와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 뉴욕 주 대표로 참석했고, 강력한 연방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헌법 제정을 주도했습니다. 1788년 헌법이 비준된 이후, 1789년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해밀턴은 초대 재무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해밀턴은 독립 전쟁 당시 각각의 주가 진 부채를 공동으로 청산하자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상대적으로 부채가 적은 버지니아 주 출신인 초대 외교부 장관 토머스 제퍼슨은 각각의 주가 자체적으로 상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해밀턴은 남부인 메릴랜드 주에 수도 워싱턴 디시를 설립하는 조건을 제안했고, 결국 연방 정부가 13개 주의 빚을 공동 상환하기로 타협했습니다. 연방 제도가 실질적으로 확립된 순간이었고, 이 순간을 흔히 해밀턴 계기(Hamiltonian moment)라고 부릅니다.
해밀턴은 중앙집권과 엘리트의 지배가 영국이 이룩한 부국강병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방의 재정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중앙 은행을 설립했고,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옹호했습니다. 중상주의(mercantilism)는 15~18세기 유럽 국가들이 채택했던 경제 정책으로 보호 무역을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연방주의자를 해밀턴주의자(Hamiltonian)라고 불렀고, 해밀턴은 1789년 결성된 연방당(Federalist Party)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해밀턴을 신뢰하고 지지했지만, 연방당의 대표격인 존 애덤스는 해밀턴을 경계했습니다.
상공업 중심의 경제를 운영하는 북부 주들과는 달리 대농장 중심의 경제를 운영하는 남부의 주들은 농업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프랑스의 중농주의(physiocracy)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지지했습니다. 버지니아 주 출신인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 정부 내에서 남부 주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1792년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을 결성하여 공화주의와 반연방주의를 옹호했습니다. 연방당이 영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데 반하여, 민주공화당은 프랑스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민주공화당의 집중 공격과 연방당 내의 존 애덤스의 견제로 인해 1795년 재무부 장관직을 사직한 해밀턴은 재능에 어울리는 공직을 찾았지만 실패했습니다.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인 토머스 제퍼슨과 애런 버는 연방당 후보인 존 애덤스와 찰스 핀크니를 이겼지만, 토머스 제퍼슨과 애런 버는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에서 73표로 동수를 얻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는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의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이 되고, 두 번째 득표자가 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정당이 다른 존 애덤스 밑에서 부통령을 지내면서 임기 내내 존 애덤스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토머스 제퍼슨과 애런 버는 서로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1801년 미국 연방 하원 투표로 대통령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의 완고한 반연방주의를 경계한 연방당 의원들이 애런 버를 지지하는 바람에 35번이나 투표를 하고도 대통령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토머스 제퍼슨보다 애런 버를 더 싫어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했고, 36번째 투표에서 메릴랜드 주와 버몬트 주와 델라웨어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입장을 바꾸어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부통령이 된 애런 버는 사사건건 토머스 제퍼슨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1804년 7월 11일 뉴저지 주에서 오랜 정적이었던 전직 재무부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과 미국의 3대 부통령인 에런 버는 결투를 벌였습니다. 해밀턴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다음날 사망했습니다. 해밀턴이 사망하자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미국 전체의 여론이 애런 버를 비난했고, 애런 버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애런 버는 나폴레옹에게 영국 대신 미국을 공격하라고 설득했지만, 나폴레옹은 애런 버를 무시했습니다. 해밀턴이 죽자 구심점을 잃은 연방당도 소멸되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1751년 버지니아 주의 포트 콘웨이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뉴저지 칼리지에서 공부했습니다. 병약했던 매디슨은 독립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776년 버지니아 주 제헌 회의(Virginia constitutional convention)의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주를 독립 국가로 선언하고, 버지니아 주 헌법과 버지니아 주 권리 선언을 제정한 버지니아 주 제헌 회의에서 매디슨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연설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매디슨은 1780년부터 1783년까지 버니지아 주 대표로 연합 회의(Congress of the Confederation)에 참석했고, 신생 공화국의 중앙 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디슨은 1780년대 중반 여러 주의 대표를 모아 일련의 회의를 개최하는데 적극적이었고,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새로운 헌법(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초안을 마련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매디슨은 새로운 헌법이 버지니아 주에서 비준되도록 애썼고, 연방주의자 문헌의 일부를 작성하여 뉴욕 주에서도 헌법이 비준되도록 도왔습니다. 헌법 비준 이후 매디슨은 연방 하원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의 채택을 주도했습니다. 1790년대 초반 미국에 필요한 정치적이고 재정적인 중앙집권화의 수준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그때까지 정치적 협력자였던 알렉산더 해밀턴과 결별하고,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결성했습니다.
1801년부터 1809년까지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매디슨은 1808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812년 재선되었습니다. 매디슨은 미영전쟁(Anglo-American War, 1812~1815) 기간 영국군에게 수도인 워싱턴 디시를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잇따라 치르느라 전력을 소모한 영국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통합된 연방 정부의 강력한 지도력의 결핍으로 전쟁 기간 혼란을 겪은 미국은 본격적으로 연방 정부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의 갈등은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으로 폭발했습니다.
1745년 뉴욕 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존 제이는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제이는 제1차 대륙 회의 대표로 선출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777년 뉴욕 주의 첫 번째 주 헌법을 초안하면서 독립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778년 잠시 제2차 대륙 회의의 의장을 역임한 이후 1779년 신생 공화국인 미국을 승인하도록 스페인을 설득하기 위해 마드리드 시로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미국보다는 프랑스와의 동맹 때문에 영국과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제이는 벤자민 프랭클린, 헨리 로렌스, 존 애덤스와 함께 미국 대표로 1783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에 참석했습니다.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고, 7년 전쟁으로 획득한 플로리다 지역을 다시 스페인에게 반환했습니다. 1786년 제이는 미시시피 강 통행권 문제로 스페인과 협상하였지만, 연합 회의의 비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1780년대 제이는 신생 독립국인 미국의 한계를 절감했고, 연방주의자 문헌(제2편~제5편)에 대한 기고 역시 미국의 외교적이고 전략적인 약점에 집중했습니다. 건강 악화로 제64편만 추가하고, 제이는 연방주의자 문헌의 완성을 해밀턴과 매디슨에게 미루었습니다. 해밀턴이 51편을 작성했고, 매디슨이 29편을 작성했습니다. 헌법 비준 이후 제이는 초대 연방 대법원장이 되었고, 연방 대법원의 절차와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자 미국의 여론은 대체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이어 유럽에서도 신생 공화국이 탄생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1790년대 프랑스 대혁명의 확산을 막으려는 유럽 각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자 미국은 중립을 표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와의 무역을 동시에 확장했습니다. 미국의 실리적 경제 정책은 영국의 불만을 샀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관계 단절을 요구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존 애덤스의 연방당은 영국과의 교역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연방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 영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라는 점과 영국 해군이 해상 무역로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입니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의 민주공화당은 독립 전쟁 당시 미국을 지원한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존 제이 연방 대법원장을 특사로 파견하여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파리 조약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1794년 제이는 제이 조약(Jay’s Treaty)를 체결하고 돌아왔습니다. 북부 출신 연방당 상원 의원들은 제이 조약에 찬성했지만, 남부 출신 민주공화당 상원 의원들은 제이 조약이 영국에게 최혜국 대우를 약속한 불평등 조약이고 프랑스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이미 1793년 외교부 장관에서 물러난 토머스 제퍼슨은 귀향한 상태였지만, 민주공화당 의원들에게 편지를 써서 제이 조약 비준 반대를 독려했습니다. 사실상 제이 조약을 기획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제이 조약으로 영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고, 5대호 연안에 있는 영국 요새가 철수되고, 미국 상선이 서인도 제도에서 무역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설파했습니다. 조지 워싱턴 역시 제이 조약을 옹호했습니다. 제이 조약은 1795년 미국 연방 상원에서 비준되었습니다.
조지 워싱턴과 알렉산더 해밀턴은 제이 조약이 당시 미국과 영국의 관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조약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제이 조약에 반대하는 민주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명성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은밀하게 조지 워싱턴을 비방했고, 공개적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난했습니다. 당시 연방 하원 의원이었던 제임스 메디슨은 조약의 비준 권한은 상원에 귀속된다는 헌법 초안을 자신이 작성했는데도, 제이 조약이 상업을 규제하기 때문에 연방 하원의 승인 없이는 발효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민주공화당의 제이 조약 반대는 조지 워싱턴의 후임으로 연방당의 존 애덤스가 당선되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습니다. 1801년 대통령에 당선된 토머스 제퍼슨은 제이 조약을 폐기하지 않았지만, 제이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1806년 작성된 먼로–핑크니 조약(Monroe-Pinkney Treaty)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했고, 1815년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status quo ante bellum)” 헨트 조약(Treaty of Ghent)에 서명했습니다. 헨트 조약이 사실상 제이 조약을 대신한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이 등장하는 미국 건국 초기 역사는 서양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거인들의 전장이었습니다. 치열하게 논쟁했지만 서로를 존중했고, 당파적 이익에 충실했지만 공공의 이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당파를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당파끼리 서로 경쟁하도록 내버려두라는 제임스 매디슨이 말이 가장 잘 적용되었던 시대였습니다.
푸블리우스의 분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학생들은 “Empire of Liberty: A History of the Early Republic, 1789~1815 (Gordon S. Wood; Oxford University Press, 2009)”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연방주의자 문헌”과 “브루투스의 편지”에 관한 내용은 “The Federalist with Letters of “Brutus”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edited by Terence Bal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와 “The Federalist Papers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edited by Lawrence Goldm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