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Latin (2) - 라틴어 교재 소개
12 Jan 202220세기 한국에서 라틴어를 배우려면 거의 무조건 “휠록 라틴어(Wheelock’s Latin)”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휠록 라틴어는 전통적인 라틴어 학습 방법에 따라 문법과 어휘를 공부하고, 예문을 번역하고, 연습 문제를 푸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문법과 번역 중심의 외국어 학습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었습니다. 암기 위주의 전통적인 외국어 교수법에 반대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1)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국어는 사용하지 않고, (2) 구어 위주로 질문과 답변에 집중하고, (3) 몸짓과 실제 사물과 시각 자료를 사용하고, (4) 학습자 스스로가 귀납적인 과정으로 언어의 규칙을 숙지하도록 유도하는 자연학습법(natural method)을 내세웠습니다. 자연학습법은 직접학습법(direct method)이라고도 불립니다.
라틴어 역시 수많은 외국어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학습법을 라틴어에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결실로 덴마크의 라틴어 교사인 한스 헤닝 외르베르(Hans Henning Ørberg)가 라틴어를 라틴어로만 학습하는 새로운 라틴어 교재를 1955년에 출판했습니다. 이 교재는 몇 차례 개정되었고, 마침내 “라틴어 자체를 통해 설명한 라틴어(Lingua Latina Per Se Illustrata)”라는 획기적인 라틴어 교재가 탄생합니다.
그 뒤 1970~71년 5권으로 구성된 “케임브리지 라틴어 과정(Cambridge Latin Course)”이 출판되었고, 1987년부터 3권으로 구성된 “옥스퍼드 라틴어 과정(Oxford Latin Course)”이 출판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라틴어 교재는 순수한 자연학습법에 따른 교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역정을 따라 라틴어 스토리가 전개되고, 고대 로마의 이모저모를 영어로 설명하여 배경지식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법과 번역이 아니라 읽기와 작문이 강조됩니다.
물론 고대 로마의 작가가 직접 쓴 고전 라틴어가 아니라 현대 저자가 쓴 라틴어로 라틴어를 학습하고, 라틴어를 통해 알아야 하는 배경지식을 영어를 통해 얻는 학습법을 통렬히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사람들이 출판한 라틴어 교재가 바로 2003년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라틴어 읽기를 배우자(Learn to Read Latin)”라는 교재입니다. 이 교재는 라틴어 학습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처음에 몰아주고, 모든 예문을 고전 라틴어에서 그대로 가져와서 제시합니다.
현대적인 학습법과 전통적인 학습법을 조화시키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영국 고전어 교사 협회(Joint Association of Classical Teachers)는 1978년 “희랍어 읽기(Reading Greek)”라는 교재를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했습니다. 이 교재는 텍스트 읽기 능력을 함양하는 “텍스트와 어휘(Text and Vocabulary)” 교재와 문법과 어법과 어휘를 자세히 설명하고 연습 문제를 수록한 “문법과 연습 문제(Grammar and Exercises)” 교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86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출판된 “라틴어 읽기(Reading Latin)”도 동일하게 철저한 문법 학습과 어휘 암기를 바탕으로 읽기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텍스트와 어휘” 교재와 “문법과 연습 문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저자가 각색한 라틴어 스토리를 제시하지만, 차츰 고전 라틴어 원문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옥스퍼드 라틴어 과정”을 “라틴어 읽기”처럼 재구성한 “옥스퍼드 라틴어 과정 대학판(Oxford Latin Course College Edition)이 출판됩니다. 이 교재는 “읽기와 어휘(Readings and Vocabulary)”와 “문법, 연습 문제, 문맥(Grammar, Exercises, Context)”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중고등학교 교재 3권을 대학생과 성인에게 적합하도록 2권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활자가 엄청 작기는 하지만, 매운 알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케임브리지 라틴어 과정”이나 “옥스퍼드 라틴어 과정”의 느린 전개와 진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학생에게는 최적의 교재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로마 사람들에게 라틴어를 배우자(Learn Latin from the Romans)”와 “라틴어 집중과정 초급(Intermediate Basic Latin)”과 “라틴어 집중과정 중급(Intensive Intermediate Latin)”과 “대학 라틴어 중급과정(College Latin - an Intermediate Course)” 등도 좋은 라틴어 교재입니다. 하지만, 이 책들은 문법과 어휘 위주의 전통적인 라틴어 학습법을 고수합니다. “휠록 라틴어”를 비롯한 이러한 문법책은 읽기 위주의 라틴어 교재를 공부한 다음 문법을 정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라틴어 교재가 다양한 이유는 라틴어 학습법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라틴어를 배우든 라틴어를 학습하는 목적은 고전 라틴어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어 어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라틴어 글쓰기 전통을 모방한 영어 글쓰기 전통을 정확하게 습득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라틴어로 글을 쓰고, 고전 라틴어 스타일로 영어로 글을 쓸 수 있다면, 라틴어 학습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입니다.
라틴어는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고전 희랍어만큼은 아니지만 영어에 비하면 너무나 자유로운 고전 라틴어의 어순을 이해하고, 마찬가지로 고전 희랍어만큼은 아니지만 독일어나 프랑스어에 비하면 훨씬 더 풍부한 고전 라틴어 어휘를 체득하려면 역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물론 라틴어 학습은 의외로 재미있기 때문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라틴어를 공부한 학생의 숫자는 저와 함께 영어를 공부한 학생의 숫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혹은 고등학교 때부터 라틴어를 공부한 학생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대학의 입학했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우등생이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라틴어라는 훌륭한 거울과 인간과 세계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라틴어라는 겹눈(compound eye)을 갖추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만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풍경도 시야에 넣을 수 있습니다. 넓은 시야는 비교를 가능하게 하고, 비교는 반성과 여유를 가져오고, 반성과 여유는 더 나은 삶과 궁극적인 행복(eudaimonia)을 선사합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학생들 모두가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 라틴어 학습에 도전하기 바랍니다. 설혹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라틴어 학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후에 언젠가 불현듯이 다시 라틴어 공부에 도전할 수도 있습니다. 학창시절 놓쳤던 배움의 열정을 되찾으면서 행복을 만끽하는 중년이나 노년의 라틴어 학습자도 적지 않습니다.